우리나라 성명(姓名)의 역사(歷史)

2024. 7. 4. 07:43명리학이란?/성명학(작명)

 

(1)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고구려에서는 건국 시조인 주몽이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기 때문에, 고(高)씨라고 하였다.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 소실(小室)씨를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백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잉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부터 위덕왕(27대)

까지는 여(餘)시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의

성(姓)을 사성(賜姓)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7세기 이전 건립된 신라 진흥왕의 네 곳의 순수비,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 때 인명에 성(姓)을 사용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촌명(村名)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우리 선조는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성(姓)을 사용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土豪) 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姓)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

되었다. 

 

고려 문종9년(1055)에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렸으며 이것은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 민중이

성(姓)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주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 말에는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노비와

천민계급까지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 민적법은 어느 누구라도 성(姓)과

본(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법으로서,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姓)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를 기회로 성(姓)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지방 관리들이 마음대로 성(姓)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姓)과 본관(本貫)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명문집안의 姓氏를

모방하여 성(姓)을 정하였다. 

 

(4) 현대

 

우리나라 성(姓)은 약250개가 있고, 본관은 3,000여 개가 있었으나 국제화

시대가 되면서 귀화(歸化)한 사람들이 많아 새로 생긴 성(姓)이 늘어나면서

성씨는 약340여 개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60년대까지도 '명자', '순자' 등 일본식의 작명법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차츰 한국식의 이름으로 작명을 하게 되었고,

80년대 들어서는 순수 한글이름 짓기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한글이름은 한자가 부여되지 않아 중복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단점이 드러나게 되어 2000년대 들어서 한글이름을 다시 한자를 부여하는

이름으로 개명하는 사례가 많았고, 현재는 한글에 한자를 부여하는 작명이

보편화 되었다.

 

 

 

 

 

[발췌] 자원오행 성명학        김기승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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