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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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해의 여정≫ _ 단편 소설 13장 (자작 글)
13장. 입대 파업이 끝나고, 두 달여가 지난 뒤 철수는 입대했다. 1989년 2월 20일이었다. 논산훈련소에 도착해 사흘을 대기했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철수는 그동안의 시간을 잠시 내려놓았다. 병원도, 노조도, 혈서도, 이곳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수많은 청년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사흘 뒤, 철수는 원주 00사단 훈련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육 주간의 신병교육이 시작되었다. 그해는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시기였다. 훈련소 안에도 그 시국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신병들은 통상적인 제식훈련과 사격훈련 외에도, 전투경찰들이 받는 시위 진압 교육을 함께 받았다. 방패와 충정봉을 들고 대오를 맞추는 법,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고 ..
07:28:43 -
≪마흔 해의 여정≫ _ 단편 소설 12장 (자작 글)
12장. 혈서 1988년이 되어서도, 병원과 노조 사이의 갈등은 풀리지 않았다. 교섭은 몇 차례 더 이어졌지만 매번 결렬로 끝났다. 병원 측은 노조의 요구안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노조 활동에 앞장서는 이들을 하나둘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철수를 향한 감시는 갈수록 노골적이었다. 철수는 그 시선들 속에서도 준법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노동위원회가 중재에 나섰다. 가톨릭 신부 단체까지 나서서 병원 측과 노조 사이를 조율하려 했다. 철수가 일하던 병원이 가톨릭계였던 만큼, 그 중재는 나름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시도에도 양측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협상 테이블은 매번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결국 1988년 12월 1일,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준법 투쟁과 중..
2026.09.02 -
9월의 밤비 _ 자작 詩
열기 가득한 저녁, 열어둔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끌려 천천히 발코니 창가로 다가선다후덥지근했던 공기 가르고 얼굴을 때리는 서늘한 바람, 그 결을 따라 빗줄기가 힘차게 쏟아진다 어둠을 뚫고 떨어진 비는 아파트 난간을 치고 바닥을 뒤흔들며 거침없이 밤의 침묵을 깨뜨린다 거센 바람 소리, 세차게 꽂히는 빗소리 그 격렬한 파음 속으로 하루를 버텨낸 마음을 가만히 던져놓는다 씻겨 나가는 것은 늦더위뿐만이 아니어서, 묵은 가슴속 소란도 비 내리는 소리에 묻혀 희미해진다 아무런 생각도 머물지 않는 시간,바람이 길을 내고 비가 채우는 밤, 나는 쏟아지는 소리의 한가운데 서서 다가오는 9월을 온전히 맞아들인다. ※ 9월의 첫 날 저녁, 더위를 식혀 주는 비가 반가운 마음에 적어봅니다. - 원강(沅..
2026.09.01 -
≪마흔 해의 여정≫ _ 단편 소설 11장 (자작 글)
11장. 생리휴가와 근로기준법 1987년 6월, 거리는 온통 소란스러웠다. 전국이 들끓었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흘러나왔다. 병원 안에서는 그 열기가 조금 늦게,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었다. 6월 항쟁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곳곳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근로조건에 대한 불만이었다. 철수가 일하던 병원도 다르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지켜지는 곳은 드물었다. 여성 직원들에게 주어져야 할 생리휴가는 유명무실했다. 휴가를 신청하면, 관리자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이는 정말로 생리 중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그 말을 들은 여성 ..
2026.09.01 -
≪마흔 해의 여정≫ _ 단편 소설 10장 (자작 글)
10장. 잠 못 드는 밤 9월이 깊어갈수록, 철수의 밤은 점점 얕아졌다. 낮 동안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어머니와 아침을 먹고, 논문을 붙들고, 세 끼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월요일이면 오전에 대청소를 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밤이 되면 달랐다. 불을 끄고 누워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낯선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흙투성이 몸으로 응급실 문을 열던 남자, 화장실에서 들려오던 다급한 목소리, TA1과 TA2로 불리던 아이들의 얼굴 없는 이름들. 사실 이런 꿈은 처음이 아니었다. S전자에 입사하고 나서도, 철수는 한동안 그 병원으로 다시 출근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철수는 정장을 입은 채로 병원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미 그만둔..
2026.08.31 -
≪마흔 해의 여정≫ _ 단편 소설 9장 (자작 글)
9장. 그 밤들 접수대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온갖 얼굴이 그 문을 통해 들어왔다. 어느 밤, 한 남자가 실려 왔다. 스스로 농약을 마신 사람이었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이웃의 신고로 들어온 경우였다.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철수는 그 남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해야 했다. 이름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결국 소지품에서 신분증을 찾아 이름을 적었다. 그 남자가 그날 밤을 넘겼는지, 철수는 끝내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출근하면 새로운 얼굴들이 접수대 앞에 줄을 서 있었고, 지난밤의 얼굴을 다시 떠올릴 겨를은 없었다. 또 어느 밤에는 신혼여행을 떠나던 부부가 실려 왔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신랑은 이마에 붕대를 감았고, 신부는 팔에 깁스를 했다. 웨딩드레스 대신 갈아입었을 여행 복장..
2026.08.29